체스이야기
그런데 갑자기 제 시선이 뭔가에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. 외투들 중 하나의 옆 주머니가 좀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. 그건 책이었어요!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. 책이라니!
사 개월 동안 저는 책 한 권 손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. 줄지어 나열된 단어들을 볼 수 있고 단락과 페이지 그리고 책장들을 볼 수 있으며, 거기에서 새롭고 낯선,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생각들을 읽고 추적하고 뇌로 접수할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황홀하고 마비되는 느낌이었지요.
다행히 신문은 짧게 끝났습니다. 전 그 책을 무사히 제 방으로 가져갔습니다. (중략) 그리고 전 다시 저의 지옥으로 되돌아가서 마침내 혼자 있게 되었습니다. 그러나 더는 혼자가 아니었어요!
당신이 게임들 중, 특히 체스를 둘 때의 정신 상태에 대해 어느정도까지 생각해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. (중략) 체스란 우연과는 동떨어진 순전한 두뇌싸움인지라 자기 자신과 맞서서 게임을 한다는 건 부조라리하다는 거죠.
우리의 친구는 말없이 기다리는 이 시간을 우리 못지않게 참을 수 없어했다.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흡연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.
"체크! 킹에게 체크요!"
(중략) 첸토비치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쳐다보았다. 지금껏 그가 전혀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. 그는 뭔가를 무척이나 즐기는 것 같았다. 그의 입술에 만족스러운 듯 냉소가 천천히 번지기 시작했다.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승리를 마음껏 즐기고 난 뒤, 그는 짐짓 공손한 척하면서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.
"유감스럽게도 전 여기서 체크를 전혀 보지 못하겠는데요? 혹시 여러분 중에서 제 킹에 대한 체크를 보신 분이 있나요?"
"왜...... 그러시지요?"
나는 "기억하세요"라는 말만 하고 손가락으로 말없이 그의 손에 있는 상처를 가리켰다. 그는 무의식적으로 내 손가락을 따라가 핏빛 흉터를 멍하니 응시했다. 그러더니 갑자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는데 마치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했다.
낯선 여인의 편지
그래서 전 당신의 집 내부를 볼 수 있었죠. 제가 그때 얼마나 큰 경외심과 얼마나 경건한 존경심을 가졌었는지 당신에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! 당신의 세계, 당신이 앉아 있곤 했던, 꽃이 몇 송이 꽂힌 파란 크리스털 꽃병이 놓여 있던 책상도 보았습니다. (중략) 그 짧은 몇 분, 그것에 제 어린 시절 가운데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. 아직 저를 모르는 당신이, 마침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이 당신에게 매달린 채 흘러갔는지 알아가도록 말입니다.
매일 저녁 전 당신의 집 앞에 있었습니다. 여섯시까지는 가게에서 일했습니다. 힘들고 고된 일이었어요. 하지만 그 일은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. 왜냐하면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저 자신의 불안함을 그다지 고통스럽게 않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. 철제 셔터가 등 뒤에서 드르륵 소리를 내며 내려지면 전 곧바로 사라으이 목적지로 달려갔지요. 오직 당신을 보는 것, 한 번만이라도 당신을 만나는 것, 그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.
우리는 당신의 집으로 올라갔지요. 사랑하는 그대여, 그 복도, 그 계단이 저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던지, 얼마나 황홀하고 또 얼마나 혼란스럽던지,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얼마나 치명적인 행복이었던지 (중략) 당신을 수천 번이나 기다렸던 문 앞, 항상 당신의 발걸음 소리를 엿들었고, 그래서 당신을 처음 보았던 바로 그 계단, 제 영혼을 엿보았던 문에 붙은 작은 구멍, 무릎을 한 번 꿇은 적이 있는 당신 문 앞의 발판, 항상 엿보려고 숨어 있던 저를 깜짝 놀라 일어서게 했던 달그락 거리는 열쇠소리. 제 어린 시절의 모든 열정이 거기에. 그래요, 불과 몇 미터 안 되는 그 공간에 깃들어 있었습니다.
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. 그 아이는 당신의 아이이기도 합니다. 사랑하는 그대여, 그 아이는 당신의 아이이기도 합니다.
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/ 김연수 옮김 / 문학동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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